백년전쟁은 중세 후기 1337년~1453년, 116년 동안 잉글랜드와 프랑스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프랑스 왕위 계승에 대한 잉글랜드 왕실과 프랑스 발루아 왕가의 논쟁에서 비롯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쟁은 서유럽 전역의 파벌들이 참여하는 광범위한 권력 투쟁으로 확대되었다.
근대 유럽의 프롤로그. 중세 유럽의 역사 구분을 간단히 나누었을 때, (서로마 멸망)-프랑크 왕국-바이킹 지배-십자군 원정에서 이어지는 큰 변환점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분리를 시작으로 유럽 국가들의 국경선과 민족성이 확고히 정립되기 시작하여, 서로 다투는 과정에서 자본의 이동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발전을 일으키는 대대적인 변혁의 시작점으로 평가받는 전쟁이다.
백년 전쟁은 중세의 가장 중요한 분쟁 중 하나였다. 116년 동안 여러 개의 휴전에 의해 방해받으며, 두 개의 경쟁 왕조의 5대 왕들은 서유럽에서 가장 큰 왕국의 왕좌를 위해 싸웠다. 유럽 역사에 대한 전쟁의 영향은 지속적이었다. 양측 모두 전문 상비군과 포병을 포함한 군사 기술과 전술에 혁신을 일으켜 유럽에서 전쟁을 영구적으로 변화시켰다. 강력한 국가 정체성이 두 나라에 뿌리를 내렸고, 두 나라는 더욱 중앙집권화되어 점차 글로벌 강국으로 부상했다.
"백년 전쟁"이라는 용어는 후대의 역사가들에 의해 관련 분쟁을 포괄하는 역사적 기간으로 채택되었으며, 이는 유럽 역사상 가장 긴 군사적 충돌을 구성했다. 전쟁은 일반적으로 에드워드 전쟁(1337–1360), 캐롤라인 전쟁(1369–1389), 랭커스터 전쟁(1415–1453)의 세 단계로 나뉜다. 양측은 처음에는 영국군이 우세했기 때문에 많은 동맹국을 분쟁에 끌어들였다. 발루아 가문은 결국 프랑스에 대한 지배권을 유지하였고, 그 후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군주국은 분리되었다.
13세기 이전에는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왕이나 정치 체계가 달라도 딱히 서로를 구분하지 않았다. 예컨대 프랑스 귀족이 잉글랜드 귀족이기도 했고, 잉글랜드 왕의 측근이 프랑스에 영지를 갖고 있기도 했으며, 프랑스에 영지를 갖고 있었던 귀족이 잉글랜드 국왕 편을 들기도 했다.
존 왕이 프랑스 영토의 대부분을 상실하고, 잉글랜드의 상인들이 어느 정도 자본을 축적하게 되면서 이탈리아, 플랑드르의 외국 상인들과 본격적인 무역분쟁을 시작하게 된 헨리 3세 시절부터 잉글랜드인의 국민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1세는 고대에 브리튼 섬 전체를 통치했다는 전설적인 브루투스 왕과 아서 왕의 후계자를 자칭하며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지배권을 주장했고, 필리프 4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영어 사용을 금지한다는 '주님께서도 눈을 돌리실 혐오스러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전시 프로파간다를 퍼뜨리며 잉글랜드 신민들의 지지를 요구했다. 이렇게 싹트기 시작한 국가의식은 백년전쟁이 시작되고 에드워드 3세와 헨리 5세의 크레시, 푸아티에, 아쟁쿠르에서의 기적적인 대승으로 주입된 국뽕과 그럼에도 결국 자신들을 패배시킨 프랑스인들에 대한 적개심에 의해 가속화되었다. 잉글랜드인의 호전성과 국뽕은 이후에도 유럽 대륙 전역에서 유명했고, 헨리 7세 치세에 잉글랜드인들은 '외국인에 대해 적개심을 품고 있으며 외국인들이 그 섬나라로 들어오는 것은 오로지 그 섬을 지배하고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고 일컬어졌다.
필리프 2세 이후 프랑스 왕들은 중앙집권을 시도하며 왕권을 강화해갔다. 푸아티에 전투에서의 삽질 때문에 흔히 보수적이고 무능한 이미지로 알려진 장 2세도 군대의 지휘계통을 왕권 아래로 통합하는 군제개혁을 시도했다. 이 때문에 역사학자들은 백년전쟁을 프랑스 왕권의 영향력 확대에 위협을 느낀 독립 세력들의 최후의 저항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14세기 초의 대기근과 14세기 중엽의 흑사병을 극복하고, 116년 동안 간헐적으로 이어진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한 이후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왕권을 강화해갔다. 샤를 7세는 정부 조직을 재편하고 고등법원을 일부 지방에 설치했으며, 1438년의 부르주 칙령으로 프랑스의 교회가 교황청이 아닌 왕의 직속에 가깝게 되면서 왕권(특히 세금)이 증대되었다. 또 1448년에는 새로운 상비군 조직이 완료되었다. 루이 11세(재위 1461~1483) 때는 부르고뉴 공의 군대가 먼치킨 스위스 용병대에 쳐발리자 프랑스는 부르고뉴·오를레앙·브르타뉴에 이어 앙주, 프로방스를 차례로 직속으로 흡수했다. 프랑스군은 스위스 용병을 적극적으로 고용하고 포병 전력을 증강해 1500년대 초에는 유럽 최강국으로 떠오른다.
잉글랜드는 잉글랜드대로 카스티용 전투에서 탈보트 경이 전사하자 더 이상 요크 가문을 견제할 세력이 사라지게 되었고, 나약한 헨리 6세 치세하에서 랭커스터, 요크 양 세력은 장미 전쟁으로 격돌하게 되었다. 백년전쟁과 장미전쟁을 거쳐 잉글랜드도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갖추게 되었고, 그렇게 하여 등장하는 왕가가 바로 튜더 왕조였다. 추가로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프랑스 내의 영토를 상실하게 된 잉글랜드는 대륙 국가에서 완전한 섬나라/해양 국가화하게 되었고, 본의 아니게 해양 진출에 목매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면서 잉글랜드는 섬나라의 특성을 살려 맹활약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산업혁명을 이루어내며 막강한 해군력과 식민지를 통해 얻은 풍부한 자원으로 전 세계의 패권을 쥐어나갔다. 백년전쟁의 패배가 잉글랜드에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으로 성장하는 밑거름이 된 셈이다. 물론 잉글랜드가 이 시기에 프랑스 영토 정복에 성공했었더라면, 혹은 애초에 존 왕이 원래 물려받았던 프랑스 영토들을 잃지 않고 유지만 했었더라면 그 풍족한 생산력을 바탕으로 유럽 및 세계사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는 또 몰랐겠지만 말이다.
결국 백년전쟁은 양국 모두에게 중세 봉건시대의 종언과 절대왕정의 시작을 알리는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19세기 초엽까지 가는 오랜 라이벌 대결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우연히도 같은 1453년에 동쪽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당하면서, 1453년은 중세와 근세를 가르는 분기점이 된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아지게 된 역사적인 계기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건 전쟁을 했던 수많은 국가의 외교관계가 다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20세기에 들어오면서 2번의 세계대전 때 공공의 적인 나치 독일을 상대로 같이 싸웠던 연합국으로 동맹관계였고, 19세기까지에 비하면 사이가 많이 좋아졌다.
그래도, 부분적으로 축구 국가대항전 A매치나 국제 스포츠대회라도 열리게 되면 "딴 새끼들은 몰라도 저 새끼들만큼은 우리가 무조건 꺾어야 한다!"라면서 서로를 강하게 비방하고 싸우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아직도 영불관계에서 설문조사를 해보면 아니나 다를까 "영국과 프랑스가 가장 싫어하는 국가"로 여전히 서로를 지목하는 경우도 간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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