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페스트)는 1346년부터 1353년까지 아프리카 유라시아에서 발생한 유행병이다. 유럽에서는 1347년부터 1351년까지 유라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 7500만~2억 명의 사망자를 낸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으로 버번 페스트는 벼룩에 의해 퍼진 예르시니아 페스트균에 의해 발생하지만, 패혈증이나 폐렴성 전염병을 일으키는 에어로졸을 통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접촉이 퍼지는 2차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14세기에 창궐한 페스트의 원인균은 이전까지 중앙아시아에서 유입된 페스트균으로 추정했는데, 2022년 올해 드디어 독일/영국 공동연구팀이 역학조사를 통해 이를 증명하였다.
창궐 이전 세계 인구는 4억 5천만 명에 달했으나, 대역병의 풍파가 지나간 후 15세기에는 3억 5천만으로 줄어 최소 1억 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하였다.다른 통계엔 전 세계적으로 2억 명이 넘는 사람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이는 역사상 한 기간에 발생한 사망자 통계 가운데 가장 많은 수이다. 특히 그 기세는 1348년에서 1350년 사이의 3년간 최고조에 달하여, 유럽 인구의 30%에서 50%에 이르는 사람이 사망했다. 지역에 따라 발병률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벨기에나 폴란드의 경우 사망률이 20%에 그쳤던 곳도 있으나, 보다 극심한 지역은 사망률이 80~90%까지도 집계되었다.

대역병이 짧은 기간 내에 유럽 전역에 전파될 수 있었던 것은, 중세라는 시대적 한계에 따른 의학 지식의 부족과 그에 따른 행정적·제도적 미비가 가장 큰 원인으로 꼽힌다. 당시에는 현미경이 없었으며, 세균의 발견은 1676년 현미경을 처음 고안한 네덜란드의 안톤 판 레이우엔후크에 의해서야 이루어졌다. 예방 의학의 발달은 더욱 늦어서, 1877년 독일의 로베르트 코흐가 탄저와 콜레라, 결핵의 원인이 박테리아임을 밝혀내기 전에는 이러한 역병이 미생물에 의해 일어났음을 알 길이 없었다. 중세의 위생 관념은 현대의 그것과는 매우 달랐는데, 사체와 분변을 거름으로 사용했으며[6], 흙으로 신체를 닦기도 했고, 벼룩이나 쥐 등 유해 생물에 대한 방제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인류가 손 씻기를 생활화한 것은 1870년대에 들어서였는데, 이전에는 의사가 시신을 부검하던 더러운 손으로 산모의 출산을 돕거나 감염된 환자의 피를 뒤집어쓴 채로 다른 환자를 진료하기도 했다.
보건 당국 역시 당시의 시대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 역병의 전파가 공기, 특히 더러운 냄새 때문에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이 많았으며, 거리에 불을 피워 공기를 태우려 하거나, 기독교 신학이 지배하던 시대상에 맞게 신앙의 힘으로 병을 치료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감염자와의 접촉이 주된 전염 경로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마르세유 지방의 경우, 감염지로부터 도항한 이주자에 대한 40일간의 구금을 통해 잠복기를 넘기는 방법으로 전염을 방지하려 했다. 영어로 검역을 뜻하는 단어 '쿼런틴(quarantine)'은 바로 이 40일간의 구금 제도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러나 이런 엄격한 통제 조치는 신고하지 않은 보균자의 유입을 초래했으며, 감염자가 급증하여 1348년을 전후해 유럽의 많은 도시에서 행정력이 마비되었다.
사망률이 극히 높았던 이유로 당시 유럽의 인구 과잉 또한 꼽힌다. 1150~1300년 사이 유럽 인구는 급속도로 성장했고, 경작지와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는 속도보다 인구가 더 빨리 증가했다. 부족한 경작지는 과도하게 분할됐으며, 일부 지역에선 자율적이었던 삼포제가 강제로 시행되거나 공동지 및 임야의 이용권이 제한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인구 밀집 지역에선 경지 부족으로 생산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경제 불황 속에서 격심한 기근을 겪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식단에서 전분의 비중이 높아지고 단백질 및 비타민의 비중이 낮아지면서 유럽인들은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게 됐다. 영양실조는 면역력 저하로, 높은 사망률로 이어졌다. 유럽 내에서도 지역에 따라 사망률이 극심하게 차이가 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 이유를 경제 사정과 식단의 차이에서 찾기도 한다.
중세 흑사병 창궐의 원인으로 고양이를 악마의 동물로 여겨 씨가 마르도록 잡아댄 덕분에 고양이의 개체가 급격히 줄고, 상대적으로 쥐가 대량으로 번식해 대대적으로 병이 번졌다는 주장이 널리 알려졌다. 고양이와 개를 흑사병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오류(?)를 터트려서 쥐의 천적이 사라져 결국 쥐가 더 번식하게 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오히려 쥐에서 (사람과 더 가까이 생활하는) 고양이나 개로 벼룩이 옮겨지면서 감염이 확산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흑사병 때문에 인구가 너무 줄어들어서, 유행이 잦아든 후 유럽에는 다중 유산 상속받아 부유한 사람이 늘어나고, 인구가 크게 줄어든 탓에 노동자의 임금이 많이 상승하는 등 경제적 영향이 있었다. 실제로 영국에서는 일꾼들이 식사 제공에 많은 돈을 요구했으며, 이를 제재하기 위해 왕이 제한선을 그었으나 그러한 것들의 필요 없이 일꾼들이 많은 임금을 받았다.
이렇게 노동인구가 크게 줄어들면서 서유럽에서 농노제와 장원제의 쇠퇴가 가속됐다. 르네상스와 거의 같은 시대지만, 흑사병 창궐이 통상적으로 말하는 르네상스의 시작보다 약간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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