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의 후추는 가정집에서 아주 쉽게 접할 수 있는 향신료 중의 하나이다. 삼겹살을 구울 때, 곰탕을 먹을 때 빼놓지 않고 넣어서 먹는다. 마트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이 향신료가 15세기 이후 대항해시대에 인도항로의 개척과 함께 세계사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과거 냉장고가 없던 시기, 음식을 장기간 보관하는 문제는 세계 어떤 지역이던 가지고 있는 공통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제일 처음 사용한 방법이 소금에 절이는 염장이다. 특히 육식이 주가 되는 서양에선 사육하는 동물들이 겨울에 얼어죽기 때문에 가을에 모두 도축해야 했고, 이 때 염장을 사용했다. 독일의 소세지, 스페인의 하몽 등 소금이 들어간 육류 요리들이 바로 이 때부터 발달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염장의 문제는 누린내가 심하게 만들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게 바로 후추다. 후추는 육류의 누린내도 없앴고 방부제의 효과도 있어서 육류가 쉽게 변질되는 것도 방지했다(오늘날 고기에 마리네이드할 때 후추가 거의 빠지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다). 맛 또한 훨씬 좋게 만들어주었다. 이렇다 보니 처음 후추가 시장에 공급되었을 때, 후추를 뿌려서 한번 맛을 본 사람은 그 다음부터 반드시 후추를 찾고 고기와 곁들여 먹게 되었다. 말 그대로 맛의 혁명이었고, 맛의 신세계였다.

후추가 처음 유럽으로 전해진 것은 기원전 4세기경으로 추측된다. 아라비아반도의 이슬람 상인들이 동양에서 후추를 사 와 이집트의 항구도시 알렉산드리아나 레바논의 베이루트에 가져다 놓으면, 지중해의 무역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베네치아가 유럽 전역으로 실어 날랐다. 아라비아 상인들은 후추 공급 독점을 위해 어디서 후추를 가져오는지 비밀로 하였기 때문에 가격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그 당시 후추 가격은 공급가격 대비 판매가격이 100배가 넘었고, 가격이 이렇다 보니 유럽의 일반 국민들은 후추를 쓸 엄두도 내지 못했다. 후추는 부유했던 왕실과 귀족들만의 전유물이었다.
유럽의 후추 가격이 미친 수준이었던 것은 과시욕도 큰 몫을 했다. 어느덧 후추는 신분을 상징하는 사치품이 된 것이다. 유럽의 왕실과 귀족들은 후추를 금항아리에 보관하다 연회가 열리면 식탁에 후추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자랑했다. 어떤 귀족들은 과시를 위해 아무 음식이나 후추를 발라 내놓기도 했고 후추를 섞은 와인을 마시기도 했다. 서구의 레스토랑에 가면 테이블마다 소금과 후추가 올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아마도 이 당시의 문화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와중에 12세기 십자군 전쟁이 터지자, 아라비아 상인들의 후추 공급이 원활하지 않게 되어 후추의 가격은 폭등하기 시작했다. 이 때 베네치아 상인들은 자발적으로 십자군의 호송을 맡았는데, 엄청난 이익을 가져다주는 후추의 원활한 조달을 위해선 십자군이 동방을 차지하는 게 절대적으로 유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폭등한 가격이 결정적으로 한 번 더 폭등하게 된 것은 15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들어서면서부터다. 알렉산드리아와 베이루트 등 기존에 후추가 수출되던 통로를 차지한 오스만투르크는 후추에 엄청난 세금을 부과했고, 유럽으로 가는 후추의 공급량을 마음대로 쥐락펴락했다. 이러니 후추 가격은 금과 다름없어서 검은 황금이라고 불렸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수준인데 통후추 낱알로 거래가 될 정도였으니 얼마나 귀했는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14세기부터 유럽에 퍼지기 시작한 흑사병도 후추 가격을 올리는 데 한몫을 했다. 유럽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사라졌고 살아남은 사람들의 생활 수준은 더 높아지게 되었다. 가축의 공급은 그대로인데 인구가 줄다 보니 유럽의 사람들은 더 쉽게 육식을 접할 수 있게 되었고, 그만큼 후추의 소비량도 늘어났다. 이렇듯 수요가 많아지게 되어 후추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자, 후추의 원산지로 알려지게 된 인도를 찾는 데 목숨을 건 사람들이 여기저기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항해시대의 시작이었다.

포르투갈의 항해왕 엔리케 왕자는 아프리카를 우회하여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찾기 위해 100여 차례 이상 함대를 바다로 보냈다. 항로를 찾으러 가면서 유럽보다 문명화가 덜 된 아프리카는 포르투갈에 의해 식민지가 되어갔다. 이러다 바스코 다 가마가 15세기 후반 인도에서 후추를 가져오는 데 성공하고, 포르투갈은 무력함대를 동원해 인도의 후추를 강탈하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의 성공을 본 스페인도 본격적인 후추 찾기에 나섰다. 콜럼버스의 원정대를 보냈는데 엉뚱하게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다(이 발견으로 아메리카 대륙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고, 이 후 스페인 탐험가들이 남아메리카 대륙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만든다). 16세기 스페인이 후원한 마젤란은 남아메리카를 돌아 인도네시아에 도달하여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후추를 잔뜩 얻게 되고 세계 최초로 지구를 한 바퀴 일주한 탐험가로 역사에 남았다.
이렇듯 서로 앞다투어 바다로 향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지만, 포르투갈은 점차 쇠락해갔다. 당시 포르투갈의 인구는 스페인에 비해 초라한 겨우 100만명 수준이었고, 이 인구로는 막강한 함대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했다. 이 틈을 파고든 게 네덜란드인데 북유럽의 해양 강국 이었던 네덜란드는 17세기에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며 후추를 대거 유럽으로 들여온다. 이 때부터 유럽의 후추 가격이 폭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이에 질세라 벨기에, 프랑스, 영국이 차례로 국운을 걸고 후추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그럴 때마다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캄보디아 등이 식민지나 후추 생산기지가 되었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후추에 대한 열망은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열었고, 지리상의 발견으로 이어졌다. 이는 기술의 발전과 자본의 축적을 가져왔고 이 덕에 유럽은 모든 대륙에서 가장 먼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게 되었다. 후추가 세계사에 미친 영향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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