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로 보는 4세기 이후부터 11세기 까지의 중세시대의 정치 상황을 한 번 보자.

우선 왕권의 경우 중세 초기에 상당히 불안했다. 동로마 제국은 특유의 정치 구조 덕에 겉으로 안정적으로 보여도 황제가 틈을 보이거나 무능하면 정변이 발생해 왕조가 전복되었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 옛 영토를 각기 차지 하고 있던 게르만족은 여러 부족으로 나눠져 있어서 여러 부족 단위의 왕국을 세웠고, 여러 씨족으로 나눠져 있었기에 부족장이 왕이 되고 그 아래의 씨족장들이 귀족 계층의 자리를 차지했다. 단지 귀족 계층은 게르만족으로만 구성되지는 않았다. 이때까지 게르만족이 진출하지 않은 옛 서로마 제국 영역 안에 파견되었던 총독, 로마인, 로마인으로 동화된 켈트족 유력자들이 잔존하고 있었다. 프랑크 왕국처럼 잔존한 서로마 제국의 잔당 세력을 공격해 흡수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서고트 왕국의 경우 영토 안에 있던 모든 로마인들을 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쨋든 영토의 크기가 당연하게도 작은 소국인 것은 기본이었고, 게르만족 사회의 정치적 관념이 그대로 유지되어, 구체적인 왕위 계승법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있어 왕권이 약했고, 무엇보다 게르만족의 오랜 전통이었던 분할 상속법에 따라 왕이 죽은 후 여러 왕자들에 의해 왕국이 여러 갈레로 분할되는 경우가 많았다. 프랑크 왕국은 개국 이래로 팽창주의 정책을 펄쳐 서고트 왕국을 남프랑스 일대에서 축출하는 등 강력한 모습과는 별개로 왕권이 지방 유력자들의 협력 없이는 국가체제를 유지하기 힘들 정도였고, 이때문에 지방분권화로 지방 유력자들이 강해지는 결과로 이어지고 만다. 심지어 어린 왕들이 연달아 즉위하면서 왕권이 약해져 자연스럽게 궁재를 세습하던 가문이 작정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사례가 있었다. 그나마 프랑크 왕국은 상대적으로 나은 수준으로 서고트 왕국과 랑고바르드 왕국은 왕위 계승법이 존재하지 않았기에 귀족들에 위해 왕위가 위협을 받거나 분할 상속으로 인해 여러번 왕국이 분할되다가 다시 유혈 속에 통합되거나 랑고바르드 처럼 아예 공위 시대가 될 정도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적 혼란이 가중되었다. 심지어 서고트 왕국은 관료제와 로마법과 게르만법을 융합한 독저적인 법전을 만들어 완비해가는 과정에서 왕과 귀족들, 말기에 아리우스파를 누르고, 국교가 되 가톨릭과 유대인들간의 대립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서 6세기 초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넘어온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다만 아스투리아스 산맥의 코바동가 마을 근처에서 펠라요가 이끄는 서고트 왕국의 잔여 세력들이 이슬람군을 기습 섬멸한 후 아스투리아스 왕국을 세우고, 약 800년 가까이 진행되는 레콩키스타의 문을 열게 되었다.
8세기 후반 카를로스 왕조의 개조였던 피피누스 3세의 아들이었던 카를로스 대제가 800년 로마에 방문한 후 교황 레오 3세로 부터 서로마 황제의 제관을 받아 서로마 황제로 즉위하게 되지만 이로 인해 11년 동안 동로마 제국과 충돌하는 결과로 이어지다가 비잔티움 제국의 우위를 인정하는 것으로 바실레우스라는 칭호를 받는 것으로 일단락 된다. 카롤루스의 제국은 메로베우스 왕조 프랑크 왕국 시절과 마찬가지로 지방의 자치권이 그대로 유지 되고 있었으나 차이점은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지방의 귀족들을 갈아치우고 그 자리에 자신의 측신들로 채웠다는 점이었다.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은 당시 서유럽에서 가장 크고 사실상 유일한 제국인 상황이었으나 내부적으로는 역시나 게르만족 특유의 분할 상속으로 인해서 꾸준히 논란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카롤루스 대제를 이어 받았던 루도비쿠스 1세는 아들들과의 여러 마찰을 제위 내내 겪었고 결국 그의 사후는 아들들에 의해 갈라지게 되었고, 이는 현재의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를 이루는 계기가 된다.
그러던 중 789년을 기점으로 스칸디나비아와 유틀란트 반도에 살던 노르드, 데인족들로 구성된 바이킹들이 브리튼 제도를 시작으로 유럽 전역의 해안과 하천 일대의 지역들을 습격해 약탈 및 해당 지역을 점거하기 시작하면서 유럽 국가들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특히 칠왕국의 경우 웨식스를 제외한 여섯 왕국들이 바이킹들에 의해 무력화되고 당시 강국이었던 머시아마저 동쪽은 바이킹들의 차지가 되었고, 나머지 서쪽으로 그대로 웨식스의 종속국으로 전락되고 만다.
872년 하랄 1세 하르파그리에 의해 노르웨이가 명분상 통일이 되지만 하랄 1세 하르파그리의 실제 통치력은 노르웨이의 서부 해안가에 국한되어 있었다. 925년 알프레드 대왕의 손자인 애설스탠에 의해 바이킹들에 의한 데인로를 끝내고, 잉글랜드를 통일하며, 936년 고름 1세가 덴마크를 통일했고, 10세기말 스웨덴 또한 에리크 6세에 의해 통일이 된다.
한편 바이킹들에 의한 혼란기를 수습하지 못한 카롤루스 왕조의 왕권은 약화해져 서프랑크 왕국의 경우 봉신들에 의해 몇차례 왕위를 찬탈당하다가 987년을 끝으로 단절되면서 카롤루스 왕조의 시대가 막이 내려 서프랑크 왕국의 여러 제후들이 파리 백작이었던 위그 카페를 국왕을 선출해 카페 왕조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동프랑크의 경우 그 보다 반세기 앞서 동쪽에서 밀려오는 마자르족에 침략에 시달리다가 카롤루스 왕조의 왕통이 끊어지면서 역시나 제후들에 의해 하인리히 1세를 선출하면서 오토 왕조가 개막되었다.
하지만 이 일들을 계기로 프랑스와 독일의 왕권은 약해지는 결과로 입증되고 말았다. 귀족들 중 한명을 대표자로서 선출된 것인 만큼 귀족들을 대상으로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는 데에 제약이 생겼기고 만다. 특히 카페 왕조의 초대왕으로 즉위한 즉위한 위그는 남아있는 카롤링거 가문을 몰락시키면서 권모술수를 사용한 탓에 지지하던 영주들마저 그에게 등을 돌렸고, 왕령지 또한 현재의 일드 프랑스를 중심으로 월경지 수준으로 산개되어 있기에 왕권이 취약했다.
사족으로 중프랑크는 초대왕인 루타리우스의 봉어 이후 다시 분열되다가 결국 왕위를 승계할 후계자들도 빨리 죽게되면서 영토가 동·서 프랑크 왕국에 의해 분열되는 형식으로 해체되고 이후 이탈리아는 오랜 분열기를 가지게 된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봉건제가 형성되기 시작하며 동시에 관직이었던 공작과 후작, 백작 등이 세습화되기 시작해 유럽식 귀족 작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참고로 이때 기사 제도도 형성되기 시작했으나 이당시 기사들은 기도하는 자인 성직자 계급과 농사를 하는 사람인 농부보다 밑에 있던 자들로 이때까지만 해도 귀족 신분이 아니었다.
이후 프랑크 왕국의 서로마 제국의 계승권은 독일 왕국의 오토 왕조의 오토 1세가 제관을 받게 되면서 독일로 넘어가게 되며, 9세기를 기점으로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시작으로 독일 동쪽에 위치한 마자르 대공국이 독일 지역을 침공하지 않는 대신 군주가 직접 가톨릭으로 귀의하기 시작하는 것과 함께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일대와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들 또한 부족 사회에서 군주제 국가로 발돋음하면서 각각 가톨릭과 정교회로 개종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독교로의 개종은 전통 신앙을 고수하는 일부 왕실 일원과 야를 세력의 반발과 함께 반란으로 이어져 한동안 왕권을 위협할 정도였으나 10세기가 될 무렵 기독교화가 진행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의회와 같은 의결 및 심의 기구의 기초가 생기기도 했다. 이는 당시 원로원이 있던 로마인들뿐만 아니라 게르만/노르만, 슬라브 모두가 팅그(thing), 두마 혹은 베체라 불리는 평의회가 있었다. 두 평의회 모두 기본적으로 싸울 능력을 갖춘 자유민 남성들만 참석이 가능했다. 우선 게르만족의 팅그 혹은 알싱크의 경우 게르만족들이 서로마 제국 곳곳에서 자신들의 왕국을 세운 후에 크게 변천을 겪게 된다. 잉글랜드의 경우 7세기 경에 기존의 팅그가 위테나예모트로 바꿔졌으며, 기독교화가 진행되면서 주교 또한 웨나예모트의 일원을 참석할 권한을 갖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에선 754년 제국의회의 전신이었던 제국회합이 처음으로 문헌에 등장했고, 카롤루스의 프랑크 제국이 그의 손자들 대에서 셋으로 분할되면서 궁극적으로 독일의 전신이었던 동프랑크 왕국이 제국회합의 정통성을 거머쥐게 된다. 슬라브족의 경우 루스계 바이킹이었던 류리크가 세운 키예프 공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지만 앞서 언급한대로 바이킹을 구성하던 노르드족들 또한 평의회인 팅그가 있었기에 슬라브족들의 평의회인 베체와 섞이게 된다. 이밖에도 930년 건국된 아이슬란드 연방은 알팅그를 정치주체로 하는 여러 부족들로 구성된 연방제 국가였다.
이밖에도 아일랜드와 스코트랜드에서도 각각 부족 국가가 세워졌고, 이중 스코트랜드 지역에서 아일랜드에서 넘어온 게일인과 원주민들인 픽트족들이 융합하면서 10세기에 스코틀랜드 왕국이 세워졌다. 다만 아일랜드는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데 실패한다. 또한 앵글로·색슨의 침공때 유일하게 침공을 면한 웨일스 지방은 십여개 이상의 소국으로 존재했으며, 이후 중세 중기가 되기까지 귀네드, 룽 구이 아 하브렌, 포이스, 구엔트, 데허이바르스의 다섯 국가로 통합되지만 끝내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지증해 도서 지역들 또한 정치적 변동이 심했다. 코르시카의 경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 전 이미 반달 왕국의 영토였다가 522년 동로마 제국령으로 편입되었으며, 사르데냐, 시칠리아 또한 오도아커르 왕국, 동고트 왕국의 영토로 있다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고토 수복 전쟁을 거쳐 동로마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하지만 유스티니아누스 1세 말기에 닥치 전염병과 7세기 중반 사산 왕조와의 전쟁 9세기 전후로 남쪽으로 이슬람의 발호와 함께 카르타고와 이집트, 팔레스타인 지역이 넘어갔고, 북으로는 루스인 및 현재의 발칸 지역에 대한 슬라브인, 마자르 및 불가리아인들의 침락을 받았고, 바이킹 역시 지중해에 진출하면서 큰 위협이 되었다. 이는 코르시카와 시칠리아가 이슬람 세럭의 점령되어 지배하에 들어갔지만 유일하게 사르데냐만큼 기독교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이때 사르데냐는 주디카티라는 일종의 4개의 독립국가들로 나눠져 '판사'라는 의미를 지닌 주디체 혹은 유디케(judike)들이 군주들이 지배했는데, 이들의 승계는 다른 유럽 국가의 군주제처럼 가문의 승계에 의한 것도 있지만 간혹 민주적으로 일종의 의회격인 코로나 데 로구에 의해 선출될 가능성도 있었다.#
현재의 체코와 슬라비아 지역으로 이주한 동슬라브계 부족들은 622년까지 아바르족들에게 지배를 받다가 623년 모라비아와 슬라비아 서부, 저지대 오스트리아와 슬로바키아를 포함한 지역 내에서 프랑크인 상인이었던 사모를 중심으로 한 왕국을 세워 아바르족에게서 독립했고, 이후 영토를 지속적으로 확장해 체코의 서부인 보헤미아와 엘베 강 유역의 소르비아와 카탈리아 등을 점유했고, 631년 프랑크 국왕이었던 다고베르트 1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등 국가의 기틀을 견고할 것만 같았지만 658년 사모의 죽음과 함께 왕국이 해체된다.
이후 800년대 사라진 사모 왕국의 중심지인 보헤미아와 슬로바키아를 중심으로 모라바 공국이 세워지고 이후 스바토플루크 1세때 칭왕까지 하는 등 세력을 떨쳤으나 907년 마자르인들의 침공으로 멸망하게 된다. 이떼 보헤미아 지역이 신성 로마 제국에 공작령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 발칸 지역은 5세기까지 동로마 제국의 확고한 영토였으나 6~8세기 동로마 제국 내의 정세가 개판이 되면서 이에 대한 방비가 허술해지면서 발생한 슬라브족의 이동으로 여러 슬라브족들과 불가르족, 그리고 마자르족들이 발칸으로 향해 대대적으로 남하하였다.
이로 인해 불가르족들이 먼저 발칸 반도에 정주해 점차 같이 발칸에 정주한 슬라브족들을 복속시켜가며 불가리아 제1제국 세운 후 동로마 제국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한편 자치 도시의 경우 서로마 제국의 붕괴 후 백년 전 먼저 공화제로 건국되었던 산 마리노처럼 도시 국가로 독립할 여건이 되었으나 도시의 유력자들이 도시 밖에 있단 자신들의 소유인 대농장과 그곳에 딸려 있던 요새로 피신하는 것을 택하는 등 큰 공백이 생겼다. 본래 서로마 재국이 붕괴되기 이전까지만 공화정부터 시작한 이래로 고위 관리들을 명예로운 경력이라 무임금에 기초한 선출직으로 운영되었으며, 이는 자치 도시라 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때문에 자치 도시 내의 자산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도시의 고위 관리로 선출되려고 기를 썼다.
하지만 서로마 제국이 붕괴되면서 이러한 메리트가 사라지면서 유력자들은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는 것을 포기한체 도시 밖으로 피신하게 되자 그빈자리를 교회가 대신 매꾸기 시작했다.교회는 십일조 등의 다양한 경로로 얻은 교회 자금을 바탕으로 도시 내의 사법권과 행정권을 행사하게 되면서 도시의 통치권은 주교들이 갖게 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로마 또한 로마 총대주교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게 된다.
이후 교회는 가톨릭으로 개종한 게르만족 군주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파트너로 자리매김하게 되나 도시의 경우 라벤나 총독부의 함락 이후 우연치 않게 독립한 베네치아를 제외하면 주교의 통치를 받게 되며, 주교좌가 도시에 설치되었기에 12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도시는 주교가 통치하는 곳으로 인식하게 된다.
외교적으로 중세 초기인 5~11세기까지만 해도 서유럽에 대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어느 정도 잔존하고 있던 상태였다. 비록 동로마 제국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게르만족계 국가들도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그대로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때문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성립된 오도아케르의 왕국 또한 서로마 제국의 제관을 콘스탄티노풀로 보낸 후 동로마 제국에게 왕국으로 인정받았으며, 동로마 제국과 인접한 나라들도 동로마 황제에게 자세를 낮추는 대신 동로마 황제는 이들에게 바실레우스 칭호를 허락하는 유연한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이런 동로마 황제의 권위에 의구심을 갖는 국가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8세기를 기준으로 카롤루스 왕조 하의 프랑크 왕]의 서유럽 제패와 함께 피핀 3세의 기증으로 이탈리아 중부에 교황령이 성립이 되면서 정치 지형에 변화가 생긴다.
우선 콘스탄티누스 1세의 콘스탄티노풀 천도 이후 5세기를 전후로 삼위일체를 정통 교리로 삼은 기독교는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풀을 중심으로 한 동방교회로 교리 문제 등으로 분열해가고 있었다. 더욱이 서로마 제국의 붕괴 후 로마를 장악한 로마 총대주교를 비롯한 서방 교회의 성직자들이 무정부상태가 된 자치 도시의 통치권을 장악하면서 동방 교회뿐만 아니라 동로마 황제하고도 점차 대립각을 세우게 된다.
그러다 8·9세기에 걸쳐 두 차레의 성상 파괴 운동과 그리고 랑고바르드 왕국이 동로마 제국의 라벤나 총독부를 점령하는 등[13] 로마가 위치한 중부 이탈리아로 진출한 야욕을 보이자 로마 총대주교였던 자카리아는 당시 메로비로스 왕조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새로운 프랑크의 국왕 피핀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랑고바르드 왕국을 공격하게 해 랑고바르드 왕국이 점령하고 있던 라벤나 총독부까지 랑고바르드 왕국으로 부터 빼았아 라벤나 총독부를 로마 총대주교에게 넘기면서 754년 자카리아의 후인 총대주교였던 스테파노 2세가 피핀 3세를 정식으로 프랑크의 국왕으로 인정해줬고, 이에 대한 답례로 피핀 또한 두번째 기증을 하면서 교황령이 성립된다.
교황령을 바탕으로 9세기 중반에 걸쳐 동방 교회를 비롯한 동로마 제국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했고, 급기야 800년 카롤루스 1세를 로마로 초청해 서로마 황제의 제관받아들이면서 811년까지 서로마 제국을 칭하는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으로 이어질 정도였다.이후 동로마 제국의 우위를 인정하고, 동로마 제국 또한 샤를마뉴에게 그냥 바실레우스 칭호를 인정할 수준으로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며 이슬람 세력과도 대립과 공존이라는 아슬아슬한 줄다리기하는 등 국제정세가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카롤루스 사후 손자대에 프랑크 왕국은 세개로 분열한 후 북쪽으로 바이킹과 동쪽으로 마자르족들의 침략을 받게 되며 남쪽으로 이슬람 해적들에게 시달리는 상황이 더 심화되며 동로마 제국 또한 발칸반도로 진출한 슬라브족들과 불가르족들의 침략에 시달리게 되었고, 특히 불가리아의 시메온 1세가 자신을 불가리아인과 로마인의 황제를 자칭하는 등 유일한 로마 황제로서의 권위를 위협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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